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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찬 한양대학교 총 동문회장과 가수 타이푼
다른 듯 ‘닮은’ 부자(父子)의 솔직+담백 스토리 올 초, 한양대학교 총동문회를 이끌어 나갈 제17대 신임회장으로 양원찬 회장(의예과 69,시너지정형외과 원장)이 만장일치 하에 선출된 바 있다. 사회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이기에 더욱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양원찬 회장이 힙합가수 타이푼(33·본명 양태웅)의 아버지라는 점. 평범한 듯 비범한 부자간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그들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외래교수, 세계7대자연경관 선정 범국민 추진위원회 사무총장, 김만덕기념사업회 공동대표 등 양원찬 회장을 수식하는 이력들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하지만 그 역시 한 집안의 가장이자 아버지. 더구나, 1남2녀 중 둘째인 태웅 씨는 양 회장에게 있어 유일한 아들이기에 애정도 남다르다. “나를 따라 의과대학에 진학해 주길 바란 적도 있었죠.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따로 있는 줄도 모르고. 처음엔 가수하겠다는 뜻을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랩퍼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 온 태웅 씨. 고단한 순간들도 많았지만, 묵묵히 바라만 봐주었던 아버지 덕분에 보다 본인의 꿈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식들한테는 아주 엄격하고 냉철한 분이세요. 저희의 선택이 과연 진심인지,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철없던 시절엔 그러한 아버지가 다소 서운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드니 이해되는 부분이 생기더라고요. 물론, 현재로서는 제 열렬팬 1호이시죠.” 스타 의사로, 또 사회사업가로, 크게 기여해 온 아버지가 늘 자랑스러웠다는 태웅 씨. 때문에 ‘랩퍼’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않도록 언제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는데. 예상치 못한 태웅 씨의 고백에 양원찬 회장이 가만히 아들 어깨를 토닥인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 태웅 씨가 “어색해요, 아버지!” 눙치고 만다. “바쁘신 것 알지만, 일부러라도 가족들과 얼굴 마주하는 계기를 많이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건강도 좀 챙기시고요!” 아들의 잔소리가 싫지 않은 양원찬 회장, “알았어, 타이푼 씨!” 대답하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일일이 내색하지 않아도 마음만큼은 애틋한 부자 사이다. 한양의 도약, 이제부터가 시작 태웅 씨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소속그룹 클로버의 인기가 무섭게 상승하고 있는 까닭. 아들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와 더불어 양원찬 회장도 신임 총동문 회장으로서의 포부를 밝힌다. “동문회장직은 감투가 아니라 봉사자의 자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모교 이상에 걸맞은 인물로 평가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겠죠. 동문들의 바람을 적극 수용하여 시대에 부응한 혁신을 이룩하는 데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건학이념에 따라 동문·모교·나라에 대한 ‘삼(三)사랑’을 몸소 실천하겠다는 양원찬 회장. 예컨대 선후배가 유기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청년동문회를 건립하고 각 단과별로 회장단을 구 성해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할 예정이라고. 그는 한양대학교의료원을 향한 애정 어린 조언도 잊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친절한 병원’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설에 대한 투자는 그 다음 얘기죠.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한 모든 직원이 헌신적인 자세로 병원의 이미지를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한양대학교의료원 특유의 장점이 바로 ‘편안함과 배려’ 아니겠어요? 병원이 잘되어야 우리 학교도 우뚝 설 수 있다는 것,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출신 최초로 강남지역에 병원을 개업하여 한양대학교의료원을 위해 두루 활약한 양원찬 회장. 과연 누가, 그만큼이나 한양대학교의료원에 대해 정확한 판단과 향후 행보를 제시할 수가 있을까. 양원찬 회장은 거듭 강조한다. ‘개혁야 말로 모든 진보의 단초’라고. 그의 존재가 새삼 든든하게 느껴진다. 글. 양원찬 한양대학교 총동문회장과 힙합가수 타이푼
201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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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되돌아 가는 것 -장현규 장현규내과의원 원장
한양대학교병원은 자신에게 고향과 같다고 말하는 장현규 원장. 고향으로 비유되는 모교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의 눈에선 그리움이 묻어났다. 모교에서 배운 사랑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깊고 진한 겸손의 향기가 가득했다. 나의 살던 고향, 한양대학교병원 최근 한양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 발전기금과 한양대학교류마티스병원 발전기금으로 각 천만 원을 기부한 장현규 원장은 자신에게 향한 관심이 쑥스러운지 연신 “별 일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78학번으로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전공의까지 마친 그에게 한양대학교병원은 모교를 넘어 고향과 같은 곳이라고 전한다. “타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늘 그리움과 나를 있게 해준 고마움으로 가득한 곳이잖아요. 그곳에서 열심히 배우고 실력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의 저와 장현규내과의원이 있는 것입니다.” 한양대학교병원 재직 당시 장 원장은 알레르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알레르기는 천식, 비염, 아토피를 다루기 때문에 한 진료과의 단독 진료가 아니라 관련과의 협진이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그런데 그당시 국내엔 그런 체계가 잡히기 어려운 실정이었는데, 한양대학교병원에서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힘써준 것이다.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장 원장은 말한다. 실력이 좋은 만큼 류마티스내과에도 관심이 많았던 장 원장은 한양대학교병원에서 류마티스내과 전공의 수련을 마쳤다. 국내에서 독보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한양대학교 류마티스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덕에 타 대학병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된 고마움이 또 한번 마음에 남았다고 고백을 전한다. 이 두 번의 고마움을 마음에 두고 살았기 때문에 보답하고자 소화기내과와 류마티스내과에 기부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곤 “이제라도 갚을 수 있게 되어 안심이다.”라며 겸손함을 놓지 않는다. 애초에 나를 있게 해주고 자라게 해준 곳.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에 자리잡은 한양대학교병원에 대한 고마움이 크기에 내 것을 나누어 주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어 준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아낌없이 받은 것이다. 꾸준하게 평생을 보답하며 살겠습니다 장현규내과의원이 천안에 자리잡은 지 올 해로 6년 째이다. 류마티스 전문병원이지만 내과 전공의 부원장과 함께 내과부터 류마티스까지 폭넓은 진료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천안 지역의 특징인 아산・대전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는 생활권으로 지역 건강에 이바지하고 있다. 장 원장은 또 다른 사랑을 실천 중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 발전을 위하여 꾸준히 지역에도 기부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거창하거나 큰 나눔은 아닙니다. 제가 자리잡고 있는 곳에 받은 사랑만큼 돌려주는 것이 제 책임인 걸요. 저의 작은 힘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애초에 나를 있게 해 준 곳에 대한 보답을 실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것도 성실함이라는 무기를 가진 자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겸손을 미덕으로 향기로운 나눔 실천을 하는 그가 있기에 한양대학교병원 후배들과 천안 지역은 든든한 후원자를 가지게 되었다. 모교에 대한 애정이 깊은 만큼 장 원장은 충고도 잊지 않았다. “최근 대형병원의 등장으로 병원들도 양과 질을 앞세운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 한양대학교병원도 추세에 걸맞게 활발한 홍보로 동문들의 모교 사랑을 일깨워야 한다고 느껴집니다.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학문에 매진하고 수련을 할 수 있도록 저 또한 열심히 홍보 해보겠습니다.” 잔잔한 그의 성품 아래엔 모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 열정을 겸손으로 감싸 안고 있음을 엿보았을 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신사였음을
201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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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병원의 희망 메신저를 자처하다-가수 남궁옥분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만큼 커다란 축복이 또 있을까. 벌써 10여 년째, 한양대학교병원의 요청이 있으면 기꺼이 달려와 공연을 펼치고 있는 가수 남궁옥분 씨도 마찬가지. ‘환자들 심연에 난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으면 나의 음악적 가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유독 청아하게 빛나던 어느 날이다. ‘한양’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푸근해 7080 시절을 풍미했던 대표적인 포크가수 남궁옥분 씨가 한양대학교병원에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된 것은 약 20년 전부터였다. 그녀는 여전히 고맙고 생생한 기억이라며 한양대학교병원과의 인연을 아끼는 사진첩 열어 보이듯 조심스레 공개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죠. 급한 차에 가까운 병원을 방문했는데, 의사들이 너무 불친절한 거예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 마침 지인이 관련 분야에 있어 최고 권위는 한양대학교병원이라기에, 바로 병원을 옮겼죠.” 진정으로 환자와 보호자의 심정을 이해하고 격려해주었던 한양대학교병원에 감동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남궁옥분 씨. 어머니를 하늘로 보낸 날에는 치료를 담당했던 의료진들이 직접 장례식장까지 찾아와 함께 눈물을 흘려주기도 했다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덕분에 어머니 가시는 길도 그리 외롭지 않으셨을 거예요. 당시 곁에서 제 어깨를 다독여 주셨던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남궁옥분 씨는 한양대학교병원을 두고 ‘아프지만 더없이 그리운’ 이라는 표현을 썼다. “언젠가 한양대학교병원에 보답해야겠다, 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동료가수이자 한양대학교병원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었던 현숙 씨가 ‘환우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보자 제안하더군요. ‘그래, 이거다!’ 싶었어요.” 더 많은 환자들을 위로하고파 한양대학교병원에 도움이 되고자 시작한 공연이었지만, 오히려 얻은 것이 더 많다는 남궁옥분 씨. 그녀는 히트곡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를 듣고 오래도록 참아온 듯한 응어리를 한꺼번에 토해내던 50대 여자 환자를 떠올렸다. “뇌수술을 하신 분이었어요. 별안간 저를 붙들고 주저앉아 정말 서럽게 오열하시더라고요. 어머니 생각도 나고 그 처절한 속내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마이크를 잡은 채로 꼭 안아 드렸습니다.” 긴 세월 노래와 더불어 숨 쉬었지만, 환자들 앞에서만큼 ‘음악의 힘’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고. 그때마다 새삼 ‘음악인이어서 행복하다’ 깨닫는다는 남궁옥분 씨의 공연 철학은 바로 ‘긍정’이었다. “암 환우를 위한 콘서트에서 공연할 때였어요. 유방암 수술을 하신 중년 환자분이 무기력하게 앉아 계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비록 가슴 하난 잃었지만, 생명은 얻으셨잖아요.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고요. 잊지 마세요.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라고 얘기했죠.” 무대가 끝나자, 환자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와 따스한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고 등을 보였다. 공연 내내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렸을, 귤 한 개였다. 순간 남궁옥분 씨는 그만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단다. “환자들 사이에서 방방 뛰어가며 노래 부르는 것이 가끔씩 죄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건강한 에너지가 그분들의 삶에 미미하나마 ‘희망’이 된다면 잠깐의 부끄러움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온 힘을 다해 병원 공연에 임해야죠.” 남궁옥분 씨는 병원이라고 해서 언제나 심각하고 침체된 분위기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반문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환자들을 위한 공연장 구축 및 문화 확립이 병원들마다 적극 이루어졌으면 한다는 것. 그러한 측면에서 한양대학교병원은 선두적인 위치에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한양대학교병원은 마치 집 같아요. 익숙하고 편안한……. 아마 의료진들의 변함없는 배려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겠죠(웃음).” 남궁옥분 씨는 환자들이 추위를 모르고 지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진심이 감격스럽기라도 한 듯, 그녀의 표정에 아늑한 노을 빛이 가지런하게 드리워졌다.
201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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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하늘이 더 맑다잖아요 -응우옌 씨와 한양대학교병원의 만남
유난히도 길었던 장마에 마침표를 찍으며 나들이는 시작됐다. 어느새 훌쩍 큰 딸의 손을 잡고 비 갠 서울 길을 거닌다. 호되게 아파 본 덕에 가족애도 더 끈끈해지고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가슴 뭉클한 온기도 느껴봤으니, 인생이란게 결코 손해만 보는 장사는 아니란다. 응우옌 티 록(52·Nguyen ThiLoc) 씨는 지난봄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위암 수술을 받았다. 남편 브이 반 웅이어(Bui van Nghia) 목사와 함께 베트남 벽지 극빈 농촌교회에서 사역활동을 하고 있는 응우옌 씨는 지난 3월 위암 말기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한 달 목회비와 생활비로 30만동(한화로 약 15,000원)을 받고 사는 형편에, 수술은 꿈도 꾸지 못했다. 치료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치료를 포기하려 했던 응우옌 씨를 다시 웃게 한 데에는 (주)영아이시 김영리 대표의 도움이 컸다. 현지 직원의 눈물 섞인 부탁을 받은 김영리 대표가 대학병원마다 VISA 신청용 초청장 발급을 의뢰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진료할수록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던 중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초청장 발급과 함께 도움의 손길을 건네왔다. “한양대학교병원의 가슴 뭉클한 결정 덕분에 5월 7일 환자초청 VISA로 응우옌 씨와 간병할 딸 브이 티 투이를 입국시킬 수 있었지요. 저명한 위암 전문의인 권성준 박사님을 만나는 행운도 얻었고요.” 응우옌 씨는 지난 5월 13일 권성준 교수의 집도로 위 전체를 절제해 식도와 창자를 접합하는 대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5월 30일 퇴원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수술 당시 이미 암세포가 위벽을 뚫고 나와 복막으로 전이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최소 6주기의 항암치료를 더 해야 한다. 지난 6월 이미 1주기 항암치료가 시작됐고, 9월 23일 4주기 항암치료에 돌입했다. 비자 만료 등의 문제로 10월 이후에는 하노이 암 전문병원에서 항암치료를 지속할 예정이다. 시한부 말기 위암 환자 응우옌 씨에게 찾아온 새 희망 브이 티 투이(30, Bui Thi Thuy)씨는 요즘 너무 행복하다. 빠른 속도로 회복 중인 어머니를 보며,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부지런한 성격에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어머니의 웃음이 늘어갈수록 한국에 대한 고마움도 커져, 이제 딸 브이 티 투이 씨에게 한국은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제2의 고국이라고 했다. “수술 경과가 아주 좋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예후가 좋은 경우도 드물다고 하시던데요?” 예고된 죽음과 극심한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환자나 가족들에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고통은 줄이면서 생존 시간은 늘이는 데 온 힘을 다한 권성준 교수는 “환자가 체력유지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생명 연장과 그 이상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일단 절대 포기하지 않는 환자 스스로의 긍정적인 생각과 노력이 중요하고요.”라며 힘겨운 치료과정을 잘 견뎌준 응우옌 씨를 격려했다. 당신은 나를 웃게 해준 사람이에요! 암 선고를 받은 후로부터 6개월. 응우옌 씨는 많이 달라졌다. 가벼워진 몸에 표정도 훨씬 밝아졌다. 밥도 잘 먹고, 한국친구도 많이 사귀었단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병원을 오가는 길에 본 아름다운 한국의 꽃들을 베트남 고향에도 심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한국의 친구들이 잊지 않고 꽃씨들을 한아름 선물했단다. 권성준 교수를 비롯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며 알뜰살뜰 보살펴 준 한양대학교병원의 의료진 또한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아직은 이겨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을 다 붙들고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우옌 씨는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살아보니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지 싶더란다. 조금 더 욕심을 가져 본다면 항암치료까지 무사히 마치고 건강한 사람이 되어 주변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는 것으로 도움 주신 분들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는 소망이 절망 끝에서 반짝, 빛나고 있었다. 글. 윤진아·사진. 이준호 아름다운 실천 | 한양대학교의료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나눔 실천'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1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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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헌신이 기적을 만든다! -김경태 한양대학교병원 산부인과 교수
병원의 발전이 곧 환자를 위한 길 최근 한양대학교병원 발전을 위해 천만 원을 기부하기로 결정한 김경태 산부인과 교수는 갑작스런 주목이 못내 쑥스러운지 크게 손사래를 내저었다. 향후 3년 동안 매달 일정액을 재단에 기탁하리라,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 한양대학교병원과 더불어 호흡한 지도 어느덧 29년째라는 김경태 교수. 세월이 담뿍 밴 청춘은 이제 은빛 머리칼과 잔잔한 주름으로 변해 버렸지만, 한양대학교병원에 대한 그의 애착만큼은 지나간 여느 시간들보다 더 뜨겁고 청청한 듯 보였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인 김 교수가 의사로서 새로운 꿈을 펼칠 수 있게끔 기운을 북돋고 발판을 제공해 준 장소가 다름 아닌 이곳, 한양대학교병원이었던 까닭이다. “한양대학교의 건학 이념은 ‘의사’라는 타이틀을 지고 살아온 제 생애 오랜 철학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근면・정직・겸손・봉사’ 정신은 제가제자들이나 자식들한테 수시로 강조하는 소양이지요.” 덕분에 아들(신경과), 며느리(핵의학과), 그리고 조카(산부인과)까지 모두 한양대학교병원 의사로 재직 중에 있다고. 한양대학교병원을 향한 김경태 교수의 마음이 얼마나 깊고 각별한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모름지기 의사란 환자를 존중하는 자세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설이나 제도적인 면에서 병원이 꾸준히 진보를 꾀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환자가 불편해하는 병원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환자들의 입장을 가장 먼저 헤아리고 필요하다면 과감한 변혁도 두려워하지 않는 의료기관, 그 중심에 언제나 한양대학교병원이 우뚝 서 있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기부를 결심했다는데. 한편, 김경태 교수는 병원 기금 마련에 의료진 전부가 적극 동참해줄 것을 여러 차례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문화는 기금이 효율적으로 운용되기 위한 시초이기도 하다며 진심 어린 조언을 전했다. 손(手)은 하나일 때보다 둘일 때 더욱 생기로우며, 움켜쥐었을 때보다는 내밀었을 때 훨씬 아름답다. 김경태 교수의 행보에 크고 작은 찬사가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 손안의 것을 기꺼이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여유, 그것이 바로 ‘생을 풍요롭게 가꾸는 자양’ 이라고 김경태교수는 귀띔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그간 수많은 환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했을 김경태 교수. 초로의 그가 소망하는 바가 있다면 딱 하나! 아내와 전 세계를 돌며 의료봉사를 펼치는 것이다. 실제로 김경태 교수의 아내는 한 대학병원의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다. “얼마 전 아주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지 뭐예요. 남편과 친정엄마의 손을 잡고, 뱃속에는 건강한 아이를 잉태한 채로. 15년 전쯤, 제가 난소 절제 수술을 실시한 생식세포암 환자였어요. 당시 그녀는 고작 12살이었죠.” 3년에 걸친 항암 치료 끝에 병원을 떠나기는 했지만, 평생 하나의 난소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여자아이가 사무치게 안타까워 내내 가슴 한 구석이 먹먹했다는 김경태 교수. 그런데 부서질 듯 가녀렸던 그 여학생이 당당히 엄마가 되어 진료실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김 교수로서는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를 직접 받아달라더군요. ‘선생님은 제가 여자의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은인이잖아요’ 라며 부탁하는데, 정말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라고요.” 산부인과 의사인 사실이 새삼 자랑스럽게 여겨졌다는 김경태 교수는 ‘산부인과 의사의 역할은 비단 자궁의 건강만을 책임지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며 거듭 힘주어 말했다. 생명이 시작되는 고귀한 공간이자 인간의 작은 우주가 즉, 여성의 ‘자궁’이기 때문. 김경태 교수가 환자들을 매사 경건하고 신중하게 대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터였다. 가진 의술이 조금이라도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데라면 어디가 됐든 흔쾌히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김경태 교수. ‘존재만으로도 눈부신 생’을 다하고자 그는 오늘도 부단히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2011-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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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소년 디마시 이야기,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찾은 희망
꿈을 안고 살아간 사람은 언젠가 그 꿈에 도달해 있다고 한다. 가난하지만 씩씩하게 꿈을 그려 온 소년 디마시. 우연처럼 찾아 온 한양대학교병원과의 만남으로 소년은 웃음과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현장으로 함께 해 보자. 아이티 소년, 디마시 이야기 2010년 큰 지진이 있은 후 아이티의 많은 아이들은 거리에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디마시도 그 중 한 명이다. 14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뛰어 놀며 추억과 꿈을 쌓아야 할 나이에 디마시는 홀로 거리에 서 있다. 디마시는 가난한 형편 때문에 고향에서 농장일을 하는 어머니와 떨어져서 형과 함께 아이티 프로트프랭스의 슬럼가 라셀린에서 차를 닦으며 하루 하루 겨우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세차도 디마시에겐 힘겨운 일이다. 어릴 때부터 조금씩 자라던 혹이 이제는 얼굴의 반을 덮어 숨을 쉬기가 어렵고 한쪽 눈은 거의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힘든 건 디마시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소년이 차 곁으로 오면 세차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손을 잡고 아이티에 있는 병원을 모두 다녀봤지만 돌아 온 대답은 ‘고칠 수 없다’는 것. 아이티의 열악한 의료 시설로는 치료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디마시는 꿋꿋하게 성심성의껏 차를 닦는다. 언젠가 찾을 꿈과 희망을 위해서. 디마시에겐 꿈이 있다.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이다. 너무나 소박하지만 디마시에겐 절박하다. 얼굴의 혹 때문에 1년 밖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한양대학교병원과의 만남, 희망의 시작 언젠가 찾아 올 꿈을 위해 매일 희망을 안고 살아 온 디마시에게 운명 같은 기회가 왔다. 도로 위에서 차를 닦는데 바로 기아대책 해외봉사단의 차량이었던 것이다. 디마시의 얼굴을 보고 심각성을 느낀 봉사단이 디마시의 사연을 접하고 그를 도와줄 곳을 수소문한 결과 한양대학교병원이 손을 내민 것이다. 한국에 도착한 디마시는 바로 한양대학교병원으로 왔다. 한양대학교병원의 첨단 진료 장비와 우수한 의료진의 꼼꼼한 진단으로 디마시 얼굴을 반이나 가린 혹의 원인을 알아냈다. “나오지 않은 치아에서 시작한 골낭종(물혹) 이예요. 초기에 간단한 시술로 쉽게 고칠 수 있는 건데 그대로 놔두다가 많이 커졌어요. 성형외과와 안과, 치과 등 관련과 모두 협진하여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김정태 한양대학교병원 성형외과 교수의 설명이다. 그리고 지난 4월 28일 첫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낸 디마시는 한층 가까워진 꿈 때문에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수술 후, 다시 만난 소년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참으로 뭉클하다. “감사합니다.” 어눌한 한국어로 먼저 인사를 건넬 정도로 밝아졌다. 1차 수술만 마쳤을 뿐인데 이목구비가 원래의 모습을 찾았고 수술 흉터도 좁쌀만한 크기의 구멍밖에 없었다. 얼굴도 되찾았고 아이티로 돌아가면 그토록 바라던 학교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였을까? 진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가는 디마시의 걸음이 나풀거리는 봄날 나비와도 같다. 자신을 위해 손을 내밀어 준 낯선 나라와 한양대학교병원의 의료진들, 또 후원을 해 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사랑을 느낀 디마시의 꿈은 사랑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모여 이루어졌음으로 더욱더 빛날 것이다. 글. 오미연·사진. 성종윤
201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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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꿈의 날개가 되어주다, 송병주 하나안과의원 원장
초등학교 때부터 의사가 꿈이었던 소년은 그 꿈을 이루고, 많은 사람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든든한 날개가 되어주고 있다. 더불어 한국을 넘어서 세계의 불우한 이웃에게 진정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아름다운 그의 이름, 바로 ‘송병주’ 원장이다. 아름다운 기부와 나눔 뒤에는 그의 사랑이 숨겨져 있다 “늘 기회가 되면 기부 형식을 빌어서 후배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이번에 기부 관리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잡히면서 한양대학교구리병원 안과에 기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화한 미소가 인상적인 송병주 하나안과의원 원장이 최근 500만원을 기부하게 된 계기에 대해 수줍게 입을 열었다. 특히 그는 세계의 불우한 이웃들을 위한 특별한 의료 봉사도 펼치고 있다. 2000년도부터 매년 한 번씩 휴가철을 이용해 ‘남산라이온스’와 함께 세계의 불우한 지역을 찾아 따뜻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 이번에 송 원장이 찾은 곳은 네팔. 하루에 몇 건의 수술을 치르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백내장을 앓던 사람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환자보다 더 뿌듯했다고 한다. 송병주 원장은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일병원에서 근무하다 다시 한양대학교구리병원으로 돌아와 안과 과장까지 역임한 후 2004년 1월, 하나안과의원을 개업해 지금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사실 제가 한양대학교구리병원에 3년 정도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교수 생활을 짧게 해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그 때 당시 저는 후배들에게 제 모든 것을 다 전수해 줬습니다. 하나안과의원을 개업하면서 갑자기 나오게 돼 지금까지도 한양대학교구리병원에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미안함을 기부로나마 갚겠습니다.(웃음)” 무엇보다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그는 진정 다른 의사들의 본보기다 “제가 태어날 때쯤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셨어요. 할머니는 저와 할아버지를 두고 누구 곁에 있어야 할지 선택하셔야 했죠. 결국 할머니는 저를 선택하셨지만 더 놀라운 건 뭔 줄 아세요? 제가 태어난 바로 그 다음날, 할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나으신 거예요” 그 일은 ‘의사의 길’을 선택한 송병주 원장에게 행운의 시작이었다. 그 뒤로도 그는 대학시험에서 전기에 떨어지고 후기에 붙으면서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전공 선택 당시, 원래는 내과나 소아과 파트를 가고 싶었지만 안과를 가면서 진정으로 자신에게 딱 맞는 분야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행운의 뒤에는 그의 노력이 숨겨져 있었다. 안과 전문의 시험에서 수석 합격을 하고, 한양대학교구리병원 재직 당시 동아일보에서 뽑은 안과 부문‘전국의 명의’로 선정된 것은 그의 노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지금까지 좋은 은사님을 많이 만난 것 같습니다. 특히 레지던트 시절에는 고명규 선생님의 지도하에 일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는 등 참 열심히 살았던 같습니다. 그때 비로소 안과의 토대를 쌓을 수도 있었구요.” 겸손한 말로 자신의 공을 은사님에게 돌리려는 그는 앞으로도 병이 있는 불우한 환자들 곁에서 함께 하겠다는 평생의 꿈을 내비쳤다. 더불어 그는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열정적이었던 전공의 시절이 가끔은 참 그립습니다. 후배 분들도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모든 일에 열심히 임하면서 따뜻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좋은 의사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글. 하나영·사진. 권용상 [아름다운 실천] 한양대학교의료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나눔 실천’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1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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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남 청신호와 함께 2011시즌도 홈런! 최희섭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선수
웃는다. 새신랑 타이틀을 단 지 4개월 만에 아빠가 된 최희섭(33·KIA 타이거즈)선수. 만면에 고인 미소를 보니 굳이 득남 심경을 묻지 않아도 될 듯하다. 전날 광주에서 경기를 마치자마자 밤공기를 가르며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아내의 손을 꽉 잡았다. 196cm 거구의 ‘빅초이’ 가 연신 터뜨리는 함박웃음에 병동 전체에 해피 바이러스가 퍼졌다. ‘아주 특별한 가족’이 떴다!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최희섭 선수의 부인 김유미 씨가 3월 28일 한양대학교병원에서 3.49kg의 건강한 남자아이를 순산했다. 2010년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새신랑이었던 최희섭 선수가 2011년 프로야구 대표 새내기 아빠가 된 순간이다. 연이은 ‘새’ 타이틀이 쑥스러우면서도 기쁜 눈치다. “아내나 저의 모교 병원으로 가면 할인혜택이 많았을지도 모르지만(웃음), 어머님의 의지가 워낙 완고했어요. 전에 한양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으셨는데, 이곳의 의료서비스에 크게 감동하신 모양이에요. 한 생명이 태어나는 중차대한 일이니만큼 믿을 수 있는 병원에 가야 한다며 우리 부부를 이곳으로 이끄셨지요. 시즌 준비와 맞물려 만삭의 아내 곁을 지켜주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렸는데, 제 빈자리를 따뜻하게 메워준 한양대학교병원 의료진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긴긴밤 잠 못 들게 하던 차진 울음 한국 야구사에 큰 획을 그은 한국인 최초 야수 메이저리거 최희섭. 빅리그를 호령할 홈런타자로의 성장 시점에 뇌진탕이라는 대형 악재를 만나 빅 리그 최고 슬러거로의 꿈을 접어야 했다. 국내 복귀 후에도 부상 시련이 끊이지 않았던 그에게 2009년 3할 8리 33홈런 100타점은 극기의 노력이 일궈낸 신화적 반전이었다. 득남을 며칠 앞두고 광주에서 열린 두산과의 시범경기에서 모처럼 장타 실력을 뽐낸 최희섭 선수는 부상을 딛고 서서히 타격감을 끌어 올리던 참이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즐거운 경기 한 판으로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또다시 다가올 혹독한 시즌을 준비하며 그는 아내에게, 아들에게, 지인들에게 더 좋은 동행자가 되어간다는 자신감을 얻는다고 했다. “저는 메이저리그 도전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분명 아쉬움은 있지만 많은 것을 배웠고, 동양인이 중심타자의 포지션 1루에 설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결혼하면서 더 오래, 더 열심히 야구를 하자는 마음이 생겼어요. 아내에게도 앞으로 10년 동안 최선을 다해 뛰겠다고 약속했지요. 앞으로 10년, 개인적으로 KIA 타이거즈 최다 홈런기록을 세우고 싶어요.” LCK포의 키를 쥔 4번 타자 최희섭이 올해 더욱 주목 받고 있다. 주장을 반납한 이유도 더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명가 KIA 타이거즈의 2011시즌 중심타선을 책임질 최희섭 선수는 득남 이튿날 광주에서 열린 자체 청백전에서 시원한 홈런포와 함께 청신호를 쏘아 올렸다. 2세 탄생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최희섭 선수는 외롭고 힘들었던 지난 10년 프로야구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고 있다. “이제 제 나이 서른셋입니다. 앞으로 3년이 전성기인데 그 이후 제가 어떻게 될지는 이 3년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힘들 때 한 번 더 일어날 힘을 주는 게 가족이잖아요. 이제 우리 아들도 태어났으니 두려울 게 없습니다. 그저 건강하고 인성 바른 아이로 자라길 바라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 본다면 훗날 아들이 야구선수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올라 부자(父子) 메이저리거 기록을 한 번 세워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본인이 원한다면요(웃음).” 이 부부가 사는 법 오후 내내 최희섭 2세의 첫 노래자랑이 계속됐다. 밤새 두근거리고도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렸을 부모에게 보답하듯 우렁찬 소리다. 지난 연말 ‘강릉 사위’ 최희섭은 자율훈련 기간을 맞아 처가에 머물며 설악산 대청봉을 등반하고 부인과 함께 자비원을 찾아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자신이 뿌리고 온 씨앗이 가치 있게 영글어 아이들의 어깻죽지에 튼튼한 날개로 돋아나길 바란단다. 아버지가 되어 기꺼이 나눔 행렬에 몸을 실은 그가 “당신도 어서 자신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이웃과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삶을 확장하는 즐거움을 느껴보라!”라고 권한다. 새로운 출발선에 선 최희섭 선수가 한 땀 한 땀 촘촘히 채워갈 삶의 밀도만큼, 2011시즌도 더욱 흥미진진하고 풍성해질 것이다. 질곡의 생이 고스란히 펼쳐진 그라운드에서 오늘도 ‘빅초이’ 가 힘차게 인생을 두드린다. 글. 윤진아·사진. 권용상 [아름다운 이야기] 한결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치유해 온 한양대학교의료원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201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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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사람을 바라보다, 양병환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과 명예교수
결과보다 뜻을 두고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양병환 명예교수는 퇴임 후에도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퇴임 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모습을 보니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신뢰가 느껴졌다. 양병환 교수는 그가 30년을 한양대학교병원을 다닌 것이 아니라 그곳이 나를 담아 주었다고 전했다. 성실한 신사 2011년 가족에게 덕담으로 ‘성실’에 대해 전했다고 한다.“나는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좋아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해야 할 일을 착실하게 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재직 중에도 생물정신학회와 스트레스학회 회장으로 지내며 진료와 교수직을 겸하던 그가 퇴임 후에도 학회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며 일주일에 2~3일은 한도병원 부원장으로, 건강심사평가원에서는 정신과 상임위원으로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 ‘성실’이란 단어는 양병환 명예교수와 잘 어울리는 말이다. 학창시절 성실하게 공부를 잘 했을 양병환 교수의 모습이 그려졌다. 우등생이 의과대학을 선택하는 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런데 왜 ‘정신과’ 를 선택했는지 궁금해졌다. “고등학교 때 이과였기 때문에 공대나 의대 중 선택을 한 거였지만, 인문학에 흥미가 많았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의학 중에서 인문학에 가까운 정신과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의사는 사람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과 인류문화를 탐구하는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의학과 함께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겸손한 미덕 1983년 9월 1일을 양병환 교수는 잊지 않고 있다. 만으로 27년 전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과의 문을 처음 열고 들어가던 날이기 때문이다. 거의 30년을 몸 담았던 한양대학교병원은 양병환 교수에게 ‘집’과 같은 곳이었다. 평생직장으로 생각하며 내 집이라 여기며 근무를 해왔다. 그래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정년퇴임이 2~3년 남았을 때에 제자와 후배들에게 학문 외에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 퇴임 기념으로 천 만원을 기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양병환 교수는 자신이 30년 동안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지낸 시간에 비하면 큰 돈이 아니라고 말한다. Boys, be ambitious! “퇴임을 하면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계속 진료를 하고 있으니 퇴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똑같이 바빠서 특별하게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이 없어서 조금 아쉬워요.” 성실한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바쁜 일정 속에서 한 달에 한 두 번은 도서관을 찾아 주로 문학과 역사책을 읽는다는 그. “역사를 참 좋아해요. 고등학교 시절에도 역사를 잘했어요. 역사 선생님께서 사학과 보다 의대를 선택한 것에 대해 섭섭해 하셨을 정도로요. 그리고 후배들에게도 역사를 읽으라고 추천해주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역사의 패턴을 이해하면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과 인생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어학공부에도 도전을 하고 싶다는 양병환 교수는 후배들에게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성실히 산다는 것은 노력보다 정열을 품은 최선을 뜻한다. 결과보다 목적을 가지고 살아온 인생 대선배 양병환 교수의 이 한마디는 역사를 세운 전략가들의 말과 같다. 글.오미연·사진.권용상 [아름다운 실천] 한양대학교의료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나눔 실천’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11-03-01